콩기름(수선 중)

혼잣말 알콩달콩(Ⅱ)-斷想 크로키

튀어라 콩깍지 2006. 12. 3. 18:07
 

혼잣말 알콩달콩 (Ⅱ)

-斷想 크로키





(1) 오래된 앨범


더하기 빼기 열심히 해서 평균치를 구하면 죽을 때까지 만나서 얘기 한마디라도 얽히는 사람이 제각각 몇 명이나 될까?

더구나 누군가와 익숙해지고 가까워지기까지가 송신나게도 더디고 게으른, 나같은 사람이 슬몃 손을 잡게 되는 그런 사람은 지금까지 몇이나 되었던 걸까?

어느 굴곡에서 잡았던 손을 놓쳤을까? 왜 그랬을까?-를 가끔 돌이킨다.

어느 대목이든 헐거워지지 않고 모두를 공평하게 거두고 사는 사람도 있을까만은, 이제 와서 돌아보니 더 살뜰했어야 마땅한 친구, 동료, 이웃들이 여럿이구나. 내 무심 때문에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보내기도 했을 테고 대책없이 불쑥 내려놓은 마음을 쉽사리 거둬들이지 못해 낑낑거리기도 했겠지.

그런 저런 모양과 빛깔들이 슬금슬금 허물어내리고 바래지다가 어느 날 모노톤의 두루뭉실 뭉치로만 남은 아슬한 얼굴들, 이름들… 아껴 돌보지 않으면 잊고 잊힌다는 점에서만 공평했던 거구나.

수첩의 첫 장에서 몇 십 년을 또렷이 건너 온 친구들은 나보다도 그들이 나를 아껴왔음이니 그저 감사할 일이다. 몇 명은 삐약거리던 유치원 때부터, 또 몇 명은 풋풋한 단발 가시내였을 적, 또는 대학 시절, 내 성장의 구비를 지켜보던 증인들. 피붙이 같은 동료들에게도 늘 고맙다. 내 복이 넘친다.

어떤 특별한 교집합이 마음 높이를 묶어서 그처럼 질기고 길게 이어지게 했던 걸까?

복잡하게 이유를 따질 것 없이 전생의 인연 쯤으로 해 둘까?

전생의 인연이라니. 내키지 않는군.

이미 그렇게 결정되었고, 피할 수 없이 그리 되어야만 하는 예정대로라면 대체 생각이란 건, 마음이란 건 왜 또 이리 사방팔방 튀도록 했단 말인가? 선택의 가름질로 갈팡거릴 필요 없이 넙죽 엎드려서 정해진 수순만 밟으면 될 것을…

여전히 미진하다.


확실한 것은 `낡고, 오래되고, 여전히 질긴 것들의 특별함' 뿐. 적어도 묵은 편안함에 비견될 만큼의 편안함은 다시 없다.고 생각한다. 모름지기 사람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다. 날선 긴장을 순간 무장 해제시키는 변환의 정점 아닌가? 누구라도 태무덤으로부터 오늘을 묵묵히 감당하는 근원의 힘을 물올림 받는 탓이리라. 의식의 탯자리를 그리워함도 마찬가지 아닐까? 몸도 마음도 그 뿌리는 탯자리의 무한한 안락함과 포근함에의 회귀에 닿아 있으므로…… 

그러니까 친지 또는 친구란 마음의 둥지를 공유하는 함수다. 공유는 소통을 열고, 소통은 따스한 훈풍이니 얼마든지 나를 부려도 좋을 편안함이 되는 게다. 내 헐거움을 고스란히 들켜도 일 없다. 어수룩하면 어수룩한대로 깐깐하면 깐깐한대로, 카페오레처럼 쓴 맛과 달콤함이 적절하게 섞이는 조화란 얼마나 멋지고 근사한가?

새벽이든 밤중이든 언제라도 불러낼 친구가 있음은 그래서 행복하고 부러운 일이다.


게다가 요즘은 네트워크가 받쳐주는 위력 또한 대단하다.

“거긴 몇 시니? 여긴 아침 아홉시”

“어? 그래? 여긴 밤인데? 어쩌구저쩌구… 새살새살…”

지구의 이편과 저편에서 시차를 뛰어넘은 실시간 노닥거림을 가능하게 한다

“이번 가을엔 어디쯤에서 볼까? 의논하자.”

메시지만 띄우면 중국이든, 미국이든, 배꼽을 적도에 걸친 나라이든, 막론하고 떡밥에 꾀는 붕어 떼처럼 대뜸 집합한다.

“이 악동들아, 내 생각도 좀 해줘라. 여긴 지금 꼭두새벽이야. 시간 맞추느라 잠도 못잤다. 아이구, 피곤해 하∼품!”

왈왈거리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날리는 군밤을 맞기도 한다. 꽁!

두 손 좌악 펴면 얼추 가려지는 모니터 안에 내가 보고 싶은, 나를 보고 싶어하는 얼굴들이 죄다 들앉아 있는 게다.

버튼 하나로 불러내기도 하고 삭제도 한다. (헉! 삭제라니!)

바야흐로 우리는 모두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불러내고, 차단하고, 삭제하고… 심지어 내가 엎드리고 싶을 때마다 자취 없는 유령이 될 수도 있다. 로그아웃하고도 이 방에서 저 방을 펄펄 날아다닐 수 있으니까.


지금이야 내 고질병이기도 한 탈사교성(?)의 옷자락에 몸을 숨긴 채 불시착한 외계인처럼 그저 혼자서 동서남북 방향 없는 생각놀이에 열중해도 얼마든지 좋지만, 오사카에선 상황이 달랐다. 같은 아파트에만도 파견된 주재원이 다섯 집이었고, 동네를 한 바퀴만 돌면 잠깐잠깐 한국 땅이라 착각할 만큼 사방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나랑 거의 비슷한 또래의 한국 아줌마들은 어쩌면 한결같이 깎은 인형처럼 그렇게들 이쁘고 우아하고 날씬하면서 손재주까지 많은 공주님들이었는지…

그런데 말씨, 솜씨, 조신한 몸가짐이 유려하고 정돈된 요조숙녀님들(※주의-이죽거림으로 넘겨짚지 말기를!)은 솔직히 내 체질은 아니었다.(기실, 내 체질이란 게 좀 별나다는 걸 미리 자락에 깐다)

잠깐 차 한 잔 하자면서 세 겹 네 겹 빛깔 맞춰 포개놓은 접시 위에서 길고 짧은 포크들과 조각이 아름다운 스푼, 은빛의 서버로 춤추는 무희처럼 케이크를 덜어내는 우아함. 명품 커피 포트를 감상하고 커피잔에 그려진 수제 그림에 감탄하는 안목. 세련됨… 오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십거리로 곁들이는 시시콜콜 집안 얘기라거나, 시댁, 아이들, 새로 산 보석을 부러워하다가 새로운 커피 잔을 사려고 달려나가는 일은 정말이지 당최 오래 참아낼 일이 아니었다.

강조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한심했던 것만은 절대 아니다.

김치 담았다고, 부침개 붙였다고, 냉면 말았다고, 하다못해 멸치 볶았다며 나눠먹자 들고 와서 마음부터 나눈 일이 훨씬 잦았다. 사실 말이지.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남의 땅에서의 외로움을 어떻게 견뎠고, 다양하고 고등한 문화를 어떻게 누릴 수나 있었을까?-라는 고마움과 내 덜떨어짐의 고백을 전제로 둔다.

어쨌거나 결국 잔치집의 깎은 밤이 될 수 없었던 나는 그냥 뭉툭한 감자로 토방에서 구르는 쪽을 택했다. 우선 문을 닫아걸고 음악도 틀지 않은 채 전화 코드를 뽑았다. 비로소 밀폐된 해방이 내게 휴식으로 주어졌다.

그 무렵 맞춤하게도 영사관에 채용되면서 고향에 돌아가듯이 즐거이 일로 복귀했다. 복귀라니. 다소 어폐가 있다.

하여간에 그때는 그랬다. 하늘로 난 창문조차 까마득 높고 좁은, 그 모퉁이 방에 하루를 저당 잡히는 것이 오히려 청량한 해방감이었음을 더 말 할 것도 없다. 서류 더미에 파묻히는 일이 어찌 그리도 즐겁고 감사했던지…    


(2) 다시 쓰는 일기


슬몃 돌아보니 내 친구들의 물색이 나랑 대강 닮아있다. 옳아.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구나. 초가을 붉어진 단풍잎같은 엽서라도 보내야 할까보다. 마지막으로 보낸 손 엽서가 언제였지? 전화도 뜸하고 요즘은 아주 신년 인사까지 메일로 때우고 마는걸 뭐.

아마도 오래지 않아 또박 글씨 엽서나 편지를 추억하는 버릇이 생길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본시 싫증과 변덕의 달인이므로… 디지털에 중독되어 모니터의 방대함과 신속함과 편리함을 친구 삼은 듯 싶어도 결국 속도에 멀미를 낼 것이다. 시간 문제다. 몽롱한 채 비틀거리는 현실과 슁슁 날아다니는 문명의 접점에서 문득, `내가 지금 뭘하지?' 하는, 하등 도움 안되는 자각을 할라치면 추락에도 가속도가 붙을 테니까 썩 애석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사람의 종류는 신에게 갈비뼈를 도둑맞은 남자와 신이 훔쳐낸 갈비뼈 하나가 전부인 여자. 두 종류 뿐이다. 신의 여섯째 날부터 그랬다.

결국 우리는 모두 태고로부터 불량품이라는 말과 같지 않을까? 까짖거 시시때때 고장을 일으키고 길을 잃은 들 무에 대수냐. 쫓아오는 것 없어도 천지사방 쫓기면서 허둥허둥 불안한 것도 당연하다.-고 감히 신에게 막가는 항거를 해보다가 어디서 짱돌이라도 날아들까봐  돌아보는 소심성도 유감없이 내보인다.

그저 조금 널널하면 그만 일 것이다. 내 불안에 내가 쫓기다가 뒤로 넘어져 깨지는 코-꼴이 좀 우습지 않은가? `힘센 이웃의 사돈네 팔촌의 또 작은 아버지'라도 등에 업고 허풍을 떨 일도 없다. 허풍은 사실 남의 얘기도 아니다. `힘센 이웃의 사돈네 팔촌의 또 작은 아버지'는 때로 높은 학식이 되기도 하고, 재물이 되기도 하고, 남편의 지위가 되기도 하며, 잘 커준 자식일 수도 있다.  

아무리 귀한 작품을 등에 둘러도 배경은 배경일 뿐 실체는 따로 있다-라고 가끔 나는 나를 위로한다. 이 또한 퍽 옹색한 허풍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정말 가끔은-아니 자주-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과 촘촘한 그물망 안에서 감시되고 통제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느끼기 전에 이미 중독되었을 터이나 언뜻 속자락에 감춘 꼬랑지를 본 것 같을 때도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 또 그렇다. 독한 가스 냄새는 맡지 못해도 머리 어지러운 건 금새 안다. 어떻게든 알아차리고 만다. 불량품일망정 어쨌든 신의 작품 아닌가? 거세된 집단사고장애를 앓다가도 문득문득 제정신이 들 때가 있는 게다. 

탯자리의 편안함이 얼핏, 일상의 편리함과 동의어인 줄 착각되는 요즘, 바야흐로 오웰의 큰형님이 진즉부터 온갖 기계문명을 매개로 세상의 배경에 배수진을 치고 통제와 감시의 리모컨을 누르는 건 아닐까?


나는 가끔 아는 이들의 이름을 컴퓨터에서 검색한다.

각자의 활동 영역이나 분량만큼 검색창에 행적이 뜬다. 빠져나갈 수 없다.

어떤 이는 얼멍한 망에, 어떤 이는 저인망의 촘촘한 그물에 영락없이 걸린다. 잘 묻혀있어서 검색 불능인 사람도 있다. 있어도 없는 사람. 오히려 자유로움을 기뻐할 일이다.

조금만 활약을 하는 사람이라면 몇 개의 사이트에서 계모임, 가족 상황, 취미 동아리까지 낱낱이 들킨다. 본인이 원하거나 말거나 그렇다. 컴퓨터에 여지란 없으니까. 

1984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안심했던 오웰의 큰형님은 사실, 그보다 오래 전부터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고 있는 셈이다.

이젠 또 다른 차원의 해방 전쟁이라도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닐까?

‘사람으로 돌아가자. 원시를 회복하자! 궁극의 목표는 퇴보 뿐이다!’는 기치를 들고…

관련법을 만들기 위해 국회는 여야 간에 말보다 빠른 주먹다짐이 또 몇 번 쯤 있어야 할 것이고, ‘인간성 사수!’ 퇴보노조의 붉은 띠 역시 여러 번 이마를 감쌀 것이며, 사용주인 컴퓨터들의 은밀한 회동과 협상이 밀실에서 이뤄질 것이다.

“사흘 밤 나흘 낮을 지나 극적으로 타결된 협상의 내용은 사용주 유용분 38% 유사시를 대비한 비축분 42% 인간 노조 지분 20%로 매우 원만히 타결되었습니다.”

뭐 이런 뉴스를 듣게 될지 누가 안담?  


참 시시껍덕한 생각이다.

시시하지 않은 건 그래도 천방지축인 사람이라는 규정이 과연 타당한가?-라며 다시 삼천포 삐딱선을 타기 전에 후다닥 닻을 내린다. 내가 부대낄 대상은 모니터 따위가 아닌 사람이다-고 서둘러 시선을 묶어둔다.(오늘은 여기까지만… 단서 조항도 기어이 첨부해 둔다.)

그냥 사람도 말고 잘 익어 곰삭은 친지. 그 홋껍질의 마음들. 투정부리고, 기대고, 다투다가 다시 술잔을 건네는, 모순투성이에다 허점투성이며 변덕쟁이기도 한 사람들… 잃어버린 유년의 유리구슬은 거기 어디쯤에서 반짝이고 있을 게다.

어느 날 문득, 나도 고장이 나서 추락하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뒤통수에서 반짝이던 게 한낱 사금파리가 아니었음을, 빛나는 유년의 기억이었음을, 풋풋한 시절의 추억이었음을 가슴 시리게 깨달으리라. 대책없이 감전되어 마음이 저릴 것이다.

그때는 다시, 같은 눈높이의 닮은 친구들을 구명줄 삼아서 끄덕끄덕 길을 찾겠지. 몽글몽글 절로 아득해지는 따뜻함을 갈무리하고서 더러 펼쳐보기도 하면서 그 변죽 끓이는 변덕조차도 어수룩한-그래 그런 사람으로 내내 남을 일이다. 

단풍빛 그림엽서를 부쳐야지 


편리함과 편안함. 그 집합 연산의 정점에서 오늘도 설왕설래 길을 잃는 단상.

 

                                 -2006. 9. 하룻밤새 시작된 가을날

 

                         <별, 글숲에 모이다2>에 수록/2006. 11. 5 발행

                           -도서출판(시와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