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밥(시)

여백에 대하여/정훈소

튀어라 콩깍지 2007. 7. 4. 04:22

 

여백에 대하여

 

                 정훈소


                      

나에겐 남아도는 것이 많다

시간도 남아돌고

아직까지 누구를 목숨 걸고 사랑해 보지 못해

사랑도 남아돌고

지금껏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이 나이에 인생, 그것도 남아돈다

즉 나에겐 남아도는 빈 자리, 여백이 많다는 얘기다

이 세상에 나만큼 남아도는 빈 자리, 여백이 많은 사람도 참 드물 것이다

 

나를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한다면

어느 것은 띄엄띄엄 쓴 것도 있고

어느 것은 쓰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는데 문장이 안 되어

세네 줄 쓰다가 포기한 것도 있고

또 중간쯤 가서 어느 장의 페이지를 넘겨 보면 제목만 달아 놓고

전혀 백지로 남아 있는 것도 있다

 

누군가 시간이 있다면 나에게 와서

남아도는 여백에

자신을 끼워 넣어도 좋고 적어도

이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

밑줄을 그어도 좋고 아니면 길을 가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단상이나

일기를 써도 좋다

물론 아무 뜻 없이 낙서를 하거나 유치원에 갓 입학한 조카녀석

유진에게 가져다주어

피카소 그림을 그리게 하여도 좋다

 

 

정훈소 시인
1963년 충남 서산군 안면도 출생. ·생후 3개월 후 뇌성마비 환자가 되어 학력 경력 전혀 없음. ·1996년 계간 문예지 「뿌리」 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함. 「 아픈 것들은 가을 하늘을 닮아 있다.」「 사람보다 아름다운 사람」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