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꼬투리(그림)
[스크랩] 국정브리핑-수덕여관
튀어라 콩깍지
2005. 8. 26. 20:56
수덕여관, 문화유산으로 보호하자 | ||||||||||||||||||||||||||||||||||||||||||||||||||||||||||||||||||||||||||||||||||||||||||
김일엽 · 나혜석 · 이응노등 문학 · 미술 거장 숨결 살아있어 | ||||||||||||||||||||||||||||||||||||||||||||||||||||||||||||||||||||||||||||||||||||||||||
백두대간을 따라 뻗어 내린 태백산맥에서 말을 갈아타고 서해를 향하던 차령산맥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수덕여관이 있다. 충남 예산 덕숭산 자락에 수덕사가 있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왼쪽에 곧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 한 채가 수덕여관이다. 한때는 우리나라의 내노라 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엔 주인도 객(客)도 떠나가고 곰팡이 냄새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돌계단을 올라 마당에 들어서니 이응노화백이 자연석에 새겨놓은 ‘수덕여관’이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쇠락한 초가집을 뒤로하고 숨고르기를 하며 돌계단을 바라보니 종실 큰스님으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의기소침하여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계단을 올라오던 69년 전 나혜석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임자는 중노릇 할 사람이 아니야” 세파에 휩쓸리어 지친 몸을 이끌고 친구 김일엽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수덕사를 찾은 나혜석에게 만공선사가 꾸짖듯이 한 말이다. 만공선사가 누구인가? 1871년 정읍에서 태어나 태허스님을 은사로 당대의 큰스님 경허를 계사로 사미계를 받아 득도하고 근대 선(禪)불교를 중흥시킨 큰스님이다. 이러한 스님으로부터 중 되는 것을 거절당했으니 나혜석의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초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 33살에 불가 귀의
신시(新詩)의 효시로 알려진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년 빠른 1907년 <동생의 죽음>이라는 시를 써 사실상 우리나라 신시의 지평을 연 김일엽은 평남 용강에서 목사의 맏딸로 태어나 일본에 유학한 신여성이었다. 구 한말에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불가에 귀의하여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가부장적인 사회인습에 숨 막혀 하던 김일엽은 여성은 남성을 위한 소모품이 아니라고 절규했고 여성은 남성을 위한 장식물이 아니라고 부르짖으며 세상을 향하여 몸을 던져 연출한 행위 예술가이며 전위 예술가였다. 또한 여성은 어머니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적 기독교 신화에 반기를 든 용기 있는 반란이었다.
1896년. 김일엽과 같은 해에 경기도 수원에서 부유한 관료의 집안에서 넷째 딸로 태어난 나혜석은 서울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도꾜 여자미술학교에 유학, 유화를 공부한다. 유학시절 오빠 친구인 게이오 대학생 최승구와 열애에 빠졌고 결핵을 앓던 최승구가 사망함으로서 그들의 관계는 막을 내리지만 첫사랑 최승구는 나혜석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된다. 귀국 후 내청각에서 여성화가 최초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한 그림 활동을 하는 한편 동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폐허’ ‘삼천리’를 비롯한 신문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신 여성으로서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이때 춘원 이광수와 교분을 쌓는가 하면 1919년 김마리아등과 함께 3.1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1920년. 혜석의 나이 24세 때 부유한 집안의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김우영과 정동 예배당에서 결혼한다. 결혼의 전재조건이 지금 생각해도 도발적이고 쇼킹하다. 나혜석은 그의 첫사랑 최승구의 비석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라는 브랜드에 매혹된 김우영은 그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여 신혼 여행지를 최승구의 무덤이 있는 전남 고흥으로 정하여 비석을 세워줬다. 1927년. 남편 김우영과 함께 부산항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 그림공부를 하다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 미 대륙을 횡단하여 센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일본 경유 부산에 도착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부동반 세계 일주여행을 하였으나 파리에서 독립선언 33인중의 한사람인 천도교 도령 최린과의 스캔들이 빌미가 되어 이혼한다.
여류화가 나혜석 이혼아픔 안고 묵은
여관 나혜석이 이혼의 아픔을 안고 충남 예산에 있는 덕숭산 자락을 찾아들었다. 거기에는 나이도 같은 동갑이고 잡지 ‘폐허’와 ‘삼천리’에서 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일엽이 파란만장한 32년의 속세의 삶을 접고 여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수덕사가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와있다는 전갈을 받은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했지만 답은 똑같았다. 몇 년전 경성에서 만났을 때,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아이로니칼 하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에는 인습과 사회제도가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텅 빈 여관방에는지친 몸을 누이던 나혜석의 체취는 간데없고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혜석에 연정 느낀 이응노 수덕여관
사버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청년 화가 이응노는 수덕여관에 몇 번 드나들더니만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버린 이응노는 나혜석이 이곳을 떠날 무렵 1944년 아예 수덕여관을 사버리게 된다. 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훗날 21세 연하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버리고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희가 여관을 운영했으나 그마저 2001년 사망함으로서 폐허가 되어버렸다.
뒤뜰을 돌아보니 고암 이응노가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후 심신을 추스르기 위하여 머물렀을 때 자연석 너럭바위에 문자를 추상화 기법으로 암각화(岩刻畵)한 작품이 뒷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그 바로 옆에는 당시에 식수로 이용했던 우물이 폐수에 썩어가고 있었다. 역시 샘물은 퍼내야 새로운 물이 고이나 보다. 만공선사로부터 중이 되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느낀 혜석은 수덕여관을 나와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 아닌 수도생활을 하면서 잠시 머물다 정처없이 전국을 떠돌아 다니게 된다. 안양 양로원을 거쳐 청운 양로원에 기거하던 혜석은 양로원 생활이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음인지 양로원을 뛰쳐나와 길거리를 헤메이다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져 서울 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눈을 감았다. 그때가 1948년 12월 10일이다.
관리 안돼 잡초만 무성…예술인 흔적 없어
ㄷ자형 초가집 수덕여관 안마당에는 이름 모를 잡초가 자라고 있고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재래식 구들장을 깔은 여관방을 덮히기 위한 난방용 굴뚝이리라. 그 굴뚝을 타고 올라가던 담쟁이넝쿨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 허공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어쩌면 더 이상 오를 곳을 찾지 못해 좌절한 혼백(魂魄)이 하늘에서 내려와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관리하던 이응노의 장조카마저 연고지인 경기 성남으로 떠나버린 여관에는 잡초만 무성할 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각자와 예술인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쓰레기가 어지러이 널려있고 곰팡이 냄새만 넘쳐나는 여관방 어디에도 신시(新詩)의 지평을 열었던 김일엽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그리고 동양의 심오함을 화폭에 담아 유럽인들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던 이응노의 모습은 없었다. 97년 11월 충남도 지정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관할 예산군에서 일 년에 한 두 차례 초가에 이엉을 얹고 페인트 칠을 하는 등 보수 관리하고 있지만 토지의 소유권이 수덕사에 있는 관계로 근본적인 관리가 되지 않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우리나라 근대문학과 신여성운동 그리고 화단(畵壇)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들의 작품과 체취가 묻어있는 수덕여관을 문화유산으로 고이 간직하여 후대에 물려줬으면 좋겠다. 국정넷포터 이정근 (k30355k@naver.com) ※ 국정넷포터가 쓴 글은 정부 및 국정홍보처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
출처:국정브리핑 www.news.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