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어라 콩깍지 2005. 9. 24. 13:39

파레트를 닦았다

유화제를 여러번 부어서

바싹 굳은 물감을 긁어내고 테레핀 묻혀서 바닥도 반짝이도록 닦았다

물감이 딱딱해져서 유화제를 여러번 들이부은 곳은

파레트 나무결이 솜털처럼 조금씩 일어선다

 

결벽증 환자처럼 

파레트에 윤을 주던 때가 있었지

앞뒤로 돌려 닦으며 물감 굳을 틈 없이.

그림이 중요한 지

파레트 간수가 중요한 지 헛갈릴만큼 열심히.

친구들은 일년에 하나씩 파레트를 망쳐도

들기름 먹인 장판지마냥 내 파레트는

윤기 자르르 늘상 깔끔했던 때.

 

파레트 하나로 30년을 버텼는데

묵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내가 좀 바보스럽다.

 

묵은 것

낡은 것

오래 된 것

 

나는

20년 30년 전 옷도 버리지 않아서. 못해서.

그냥 옷장에 들어있다

가끔 서툴게 수도 놓고

손바느질로 줄이거나 늘리거나 하면서

그냥 걸쳐입을 때 많다

 

바지가 좀 쨍겨도 들어만 가면 그냥 입는다

정말 떨어져서, 삭아서 입을 수 없게 된 청바지 정도나 버렸을까

유행이 쳐지거나말거나 입다보면 고놈의 유행이란 게 다시 돌아온다.

20년 주기로.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남색 빌로드 천으로 만든 원피스는

저번 여름 딸에게 물려줬다.

 

그게 그렇다

언젠가

딸애가 자박거리고 걸음마를 할 때

저수지 부근의 풀꽃을 보여주려고 외출했을 때

저수지 가까이 아는 사람의 집 밖 빨래줄에 널려있었던 양말들

깁고 깁고 또 기워서 너덜거리다 못해 바닥이 운동화 바닥만큼 두꺼워져 있던...

그 집은

어려서 내가 삼촌이라 불렀던,

외할머님 댁에서 일해주던 아저씨네 집이었고

그 무렵 아저씨는 나를 봐도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여학생 때까지만 해도

야외스케치 나가서 어쩌다 마주치면

튀긴 팝콘도 갖다주고 나는 여전히 삼촌이라 부르며 반기곤 했는데

내가 고향 마을 선생이 되어 부임한 후로는 외면했다. 그냥

나도.

새침을 떼느라 그랬던가 모르지만

늘상 인사를 놓쳤다. 나도.

 

여러곳을 전전하다 아저씨는

청소부가 되었다. 골목 밖에서도 만나고

겨울 찬바람 속

고개 숙인 채 힘겹게 쓰레기 구루마를 끌고 가는 아저씨 곁을 지나치기도 했는데

여전히 인사를 놓쳤다.

서로 말없이 그냥 지나다니기만 했다.

 

구멍 나고 또 난 아저씨의 양말을 보고나서

나도 양말을 기워신었다

버리려면 막상. 그 깁고 깁고 또 기운 양말들이 눈 앞을 어지렵혀서

내 건 아직 그보다 너무나 멀쩡한 데 싶어서

버릴 수가 없었으니까

 

나중에 들으니 암인가 뭔가로 돌아가셨단다

 

아주 오래 전 얘긴데

가끔

어려서 나를 참 많이도 귀여워했던 아저씨가

나를 외면해야했던 마음을 이제서야 헤아린다

나는 또 왜 선뜻 인사하지 못했던 걸까? 아직도 생각한다.

아주 아주 오래 전 얘긴데

기억조차 못 버린다  

아직도 미안하고

아직도 맘 저린다

 

나는

통 아무 것도 못 버린다

욕심이 많다

 

놓는 연습을 해야지.

과감히...

 

파레트도 함부로 쓰다가 버리게 되어도

중요한 게 뭔지를

파레트가 아니라 그림이라는 걸

파레트 정리에 정신을 뺏기지 않으리라는 걸,

주변에 치어서 나를 내버리지 않으리라는 걸

이제야

이제야 정갱이 치며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