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가지 얽은 살강.. 그 붉은빛을 추억함.
단호박을 1/4쪽 사왔어
딱 내 주먹만하군.
씨 빼고 껍질 살살 긁어서 작은 냄비에 넣고 푹 끓여.
부러 갈아넣지 않아도 한번만 끓고나면 형태 없이 풀리는,
내가 즐겨먹는 펌프킨 스프. 즉, 호박 죽.
유치원 때 쯤? 더 어렸을까?
경찰서와 농업학교를 지나고, 친구네 집을 여럿 지나고
구멍가게가 있는 삼거리를 지나서
길고 긴 골목을 걷다보면
솟을 대문 커다란 증조부님 댁.
이모와 오빠를 따라 쫄랑거리고 들어서면
토방이 높다랗고 대청마루가 운동장 같던 집에서
증조모님이 나만 살짝 뒤안 툇마루로 불러내시곤 했지.
새큼살이처럼 작은 냄비.
뚜껑 열면 짜안! 푸욱 고아서 시럽이 된 단호박 한쪽.
"어여 먹어라"
턱 가까이 받쳐들고 채근하시던 증조모님.
떠올리면 따라 떠오르는 게 증조모님네 시렁이야.
부뚜막을 마주 바라보는 살강. 바닥 댓살이 손질 잘한 마호가니처럼 짙던 것.
닦고 또 닦은 세월동안 깊어져서 검붉게 반짝거리던 댓살의 그 빛깔...
해서, 달콤한 호박죽은 언제나 붉어진 댓살의 기억과 함께지.
내 호박 스프는 몽글거리는 쌀가루도 생략하고
치즈 한 쪽과 우유를 넣은 퓨전식으로 변형되었지만
증조모님의, 소꼽놀이 장난감같던 양은 냄비와 빨갛게 반짝이던 시렁 빛깔이
방금 내가 씻어 엎은 그릇보다 생생한 건 왤까?
증조모님의 외동딸, 외조모님 시렁은 대나무 대신 나무 판자.
물에 젖어서 반짝일 겨를이 없었어.
바닥 판자 틈새를 벌려서 바람이 솔래솔래 들락거리던 살강.
외할머님도 자주 나를 뒷방으로 부르셨지.
젯상에서 내리면서 바로 숨겼던, 꿀발라 깨 뿌린 대추라거나 곶감 접시를 들고...
안방에 떼로 모인 사촌들 틈에서 꼭 나만 골라 빼내시곤 했다니까.
한다스를 훌쩍 넘긴 나머지 손자 손녀들은 언제나 나보다 뒤에 있었거든. 외할머니께는..
외할머니 혼자되신 나이가 서른다섯.
내 나이 서른다섯까지 나는 외할머니 턱밑에서 비를 그었는데...
더 오래 사셨더라면 더 오래 그랬을 거야.
입 짧은 아들넘은 내 펌프킨스프를 거들떠도 안봐.
애녀석이 안먹어주면 대개 안만들어버리는 게 보통의 엄마일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줄창 삶고 끓이지. 나는.
조그맣고 하얀 옥양목 수건같던 증조모님.
평생 목소리 높여본 적 없으실 외할머니.
오직 퇴근하고 온 외손녀 앞에서만, 그제 한 얘기 어제 또 하고, 어제 한 얘기 오늘 또하면서
오늘 한얘기 내일 또하려고 개켜두시던 외할머니.
두분 할머니가 새록새록 보고픈 것은
게절 탓이겠지?
가을이잖아.
바람 끝이 쌀랑한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