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정을 하고 나섰다
기필코 와장창 써버리리라
나도 나를 위해 왕창 써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리라
기세등등
은행 창구에 통장을 밀어넣고 돈을 뺀다
...
잔고부터 확인하면서 벌써 다짐이고 나발이고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가능한 앞자리 수에 변동이 없도록 뒷 떨이만 빼고있다. 에히휴!
어쨌거나
물건을 살 때 마다 우리돈으로 환율 계산을 해대는 버릇을 확 접는다
곱하기 10을 하지 않으면 금나물로 보이는 콩나물도 한낱 콩나물로 보이고
기십만원으로 환원되는 블라우스 한 장도 그냥 1, 2만 엔으로만 보인다.
똑같이 그게 그건데도 사람이란 하옇든 간사하다
(나만 간사하다고 특정지우지 않고
어물쩡, 사람이란. 하고 보통명사화를 시켜서
기타 등등의 사람들까지 몽땅 쓸고 들어가는 이 간사함!!)
이곳에 딱 하나 있는 백화점에서 여섯달만에 세일을 한다고 안내장이 왔다
투박한 생김에 들꽃을 새기고 조그마한 발을 세개 붙인 접시가 하도 이뻐서
작품 감상하 듯 그릇전을 어슬렁거리기 여러 번.
에이, 그냥 있는 그릇 쓰지뭐 돌아나온 것만도 여러 번.
아이구! 그때 안사길 정말 잘했지뭐. 20%할인이면 어디냐?고 쾌재를 올리며
실은 그거 사러 나선 길이다.
이번에야말로.. 벼르면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직원들이 경호원들처럼 늘어서서 초대장을 확인한다
자기네 백화점 카드를 가진 사람들에게 특혜를 준다는,
그래서 초대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우월감을 한 껏 조장한,
이를테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상술로 둔갑시키는 이 동네 사람들의 교묘한 상술.
초대 받은 사람들은 우쭐해서 들어가고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은 까짖 거 카드 새로 만들면 된다
다음 할인 땐 초대받을 수 있게되는 확실하고 쉬운 방법.
백화점은 이래저래 고객 늘려서 좋고
초대받은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대접이라도 받는 듯한 착각에
기분 나쁠 리 없는... 확실하고 쉬운...
한국에서도 통 백화점이란 델 안가는 내가 카드를 만든 건
귀국할 때 선물이라도 챙기다 보니 반년에 한 번 씩은 그래도 들르게 되는데
카드가 있어야 혜택을 받는다.
마일리지라거나 할인이라거나...
나도 사탕 맛에 홀려서 그만 할인매장도 찾고.. 놀아나고 있는 게다
할인도 소비다
공짜로 주는 거 아니고 내 주머니 털리는 일인 게다.
이익 봤다는 착각까지 덤으로 얹어서 털리는 지갑들...
하여간 굉장한 각오로 돌진해 들어가서
7층부터 올라간다
와코루 속옷 매장
골고루 샀다. 곱하기 10 안하고. 더하기 빼기도 절대 안하고.
역시 얼추 머릿속으로 짐작하는 것보다 두 배 쯤 더 냈다
반년에 한번이다뭐. 써버려. 팍팍. 다시 새겨 다짐하고 호기롭게 6층
검은 진주알이 달랑거리는 목걸이도 하나. 사버려 사버려.
잠자리 날개같은 드레스 하나.
그릇전을 세바퀴쯤 돌고 정작 사려했던 그릇은 그냥 관둔다.
있는 그릇들 다 깨지면... 그때 사지뭐. 한다. 콩깎지 짜잔하다.
전시장에서 그림도 보고
손주 보려면 알날이 까마득하고 내가 애 키운 건 뒷날이 까마득한 옛날일인데
집에 쌍둥이 늦둥이라도 기다리는 것 같은 얼굴로
신생아 용품점까지 깐닥깐닥 일일이 구경을 다하고 돌아다닌다.
포획물을 끌고 들어오니 시간이 네시간 쯤 갔다.
컴퓨터 했으면서 공부라도 디립다 파고 앉았다가 지질해서 나온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아들놈이
덤썩 받아들려는 봉지를
"전부 엄마 거야"
거만하게 밀쳤으면서
포장 뜯어 끌러놓으니 왼통 딸년 것이다
7천엔에 주워 온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서 피아노 연주할 딸년 모습. 흐뭇,
드레스 속에 받쳐입을 속옷... 이것도 저것도.. 안심,
드러난 어깨 위에 걸치고 있을 가디건.
달랑거리는 쵸카식 흑진주 목걸이...
그렇게 나누다 보니
내 건 윗 난닝구 두 장, 아랫 난닝구(?) 두장, 가슴 싸개 한 장...이 전부다. 흡!
나갈 때 기세등등은 폴새 짜부라들고 없다
호기로움은 은행 기계 앞에 섰을 때 애저녁에 바람 빠진 풍선이었고나! 에휴!.
그래도 내 건 있다
아들이랑 아들 아배랑. 두 남정네 건 한 개도 없다.
요새 하는 짓거리가 통 안이쁘니 쌤통이다.
아들은 안이쁠 것도 없는데... 좀 심했나??? 에잉 몰라.
(2)
주말에 딸년 연주회에 간다.
아시아 국제 뭣이 어쩌고저쩌고.. 제목도 어벌쩡한.
오사카까지 가려면 새벽밥 먹어야한다
얼굴 본 지 반년도 넘었다.
두개나 챙겨 넣은 긴팔 내복을 보면 딸년 필경 기절하려하겠지
뭔 내복을 다 입는다냐고, 깔깔거리면서.
(나는 팔팔 처녀 때도 온돌 방안에서 내복을 두개씩 입고 살았는데.
내 딸은 나보다 야물다. 온돌도 없는 일본 방에서 내복도 안입고 추운 걸 참다니...)
그래도 행여 감기 걸릴라, 꼭 챙겨입어라.고
팍 삭은 망구처럼 매우 노친네스러운 세리프를 날리면서 마구 마구 엥겨줄 것이다.
그러다 아플라. 입어라. 춥게 살지 마라. 엄마 걱정된다
엥겨주면서도 맘이 짜안할 것이다.
크다가 말아버린 것처럼 내 귓때기밖에 안차는 키도
어째 한참 자랄 때, 더구나 수험생에게 덜컥 부엌살림을 맡기고
시골로 내려간 내 탓인 것 같고
(고놈의 돈이 웬수지. 늘)
어째 좀 멋도 들고 할 나인데 통 부엌데기 꼴인 것도
너 알아서 학교 졸업해라고 떼밀어놓은 탓인 것 같아서
겁나게 애잔스럽고 겁나게 맘 아프다.
어디서 그렇게 생글거릴 기운이 나는 지
딸은 언제나 새글새글 웃는다. 고맙게도.
진짜 장보러 나간다
김치 담아야지
몽땅 종류별로.
한 나절을 견디려면 냉동 팩을 꼼꼼하게 챙겨넣고 얼음주머니도 넉넉하게 넣어서
가는 동안 삭아버리지 않도록 갈무리 할 것.
아이스박스 사고, 김치거리 사러 간다.
장조림도 만들고, 밑반찬도 양씬 만들거다.
대체 뭘 먹고 사는 지 몰라.
새로운 걱정이 또 마빡을 치려한다.
날랍게 도망!!
머릿 속 시끄러운, 잔생각들로부터 이제 고만 줄행랑 놓기!!
'콩기름(수선 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일 깝깝! (0) | 2005.10.17 |
---|---|
명심들 하시라!! 정신 뚝!! (0) | 2005.10.15 |
아소산에서 부른 애국가와 아침 태극기 게양식. (0) | 2005.10.04 |
하룻 밤 새에 (0) | 2005.09.25 |
30년 된 (0) | 2005.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