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간해선 방방 뜬 소리를 내지 않는 딸이
-"엄마 엄마"
전화 너머에서 거퍼 부르는 소리부터가 심상치 않다
-"왜? 뭔일인데?"
좋은 일보다는 혹 나쁜 일이라도 있을까봐 우선 놀래놓고 보는 여늬 엄마와 마찬가지로
일순 바싹 곤두선다.
-"3등이래"
-"뭐가?"
-"1등은 없대"
-"글쎄 뭐가?"
1회 니시노미야코(서쪽 도읍지)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 명칭의 국제 음악콩쿨에서 3등을 했는데 1등이 없다한다고.
-"2등은 있고?"
-"!!!!...."
(푸훗! 나 좀 봐. 이 못말릴 욕심!)
1등 이외엔 전부 꼴찌와 한가지라는 말, 엄마가 어려서부터 외할버지께 줄창 듣고 자란 탓이니라. ㅎㅎㅎ 미안타.
잘했다. 고맙구나야. 정말 잘했다.
그런데 딸아 너 올가을 내내 줄창 3등만 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니?
헤헤!
-"그래도 있잖아요. 어느 나라로 가더라도 대학원 진학하면 무조건 마스터 장학금 준다네요."
호오! 그으래에? 것참 잘됐구나.. 고마워라..
-"오사카와 동경에서 콘체르토 할 거구요, 여기저기 리사이틀에 불려다닐 것 같아요."
점점 반가운 소리로구만.
하는데
잠시 뜸 들이더니 훨씬 낮아진 목소리로
-"그래서 아무래도 돈이 좀 들어갈 지 몰라요"
얘 좀 봐. 꼭 이렇더라.
꺽정도 마. 엄마가 조리장수 체곗돈을 내서라도 해준다. 까짖 거. 해. 해. 뭐든지.... 탕탕탕!!!
(이거 울 아버지가 어린 내게 자주 하시던 말씀인데.. 조리 장수 체곗돈을 내서라도..
얼마나 든든하고 아릿한 말이었던가? 조리장수 체곗돈이 뭔지도 몰랐지만...)
초등학교 입학을 시켜놓으니
어려서부터 움직이는 거 좋아하던 딸애가 며칠 끙끙거리다가 털어놓았다.
무용부를 뽑는데 그걸 꼭 해보고 싶단다.
하지 그러니?
그런데 무용부에 들어가면 돈이 많이 든다한다고 고개를 떨군다.
'무시기?? 이 뭔 소리??'
(혹시 내가 애 앞에서 궁색을 떨었던가?)
마구 웃어줬다.
아이구 이런, 내 딸 좀 보게. 깔깔 너 그렇게 애늙이 되면 안돼.
너 모르구나? 엄마가 부자라는 거. 호호
해. 뭐든지. 하고 싶은 건 해.
그때도 조리 장수 체곗돈을 들먹였을까?
기억에 없지만
딸을 안고 앉아서 허파에 바람을 마구 채워줬다. 빵빵하게.
하긴,
아빠는 아직 유학생이고
엄마도 따라나설 참이니 곡예 부리긴 부릴 때다.
그래도 그렇지 애 주제에 답지 못하게 가계부 걱정을 하다니 나 참. 저게 뭐가 되려는지..
그날 활짝 펴진 얼굴로 룰룰루 학교에 간 아이가 다시 풀이 팩 죽어서 왔다
희망을 했는데 선생님이 안뽑아 줬단다. 숫자가 넘는다면서.
그래? 이유가 있었겠지. 괜히 그러진 않았을 거야.
애써 달래도 실망을 감추려 않는다.
그러니까 아버지 직위가 무슨 <사>字 붙은 집의 딸들만 뽑힌 모양이다. ㅎㅎㅎ
(일찍부터 계급이 분화되는군.)
다음 날 애 몰래 담임께 전화를 드렸다.
-"말 귀 밝은 애거든요. 넣어달라는 건 절대 아니고요. 한 번 불러서 위로를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어요. 실망을 많이 하네요. 금새 밝아질 거여요"
내가 애들 학교 보내면서 담임께 한 부탁이라곤, 거짓말 안보태고,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런데 애가 무용반에 들어갔다한다. 펄쩍펄쩍 뛰어들어와 종달거린다.
내심 놀랬다. 어? 그 말이 아니었는데...
학교로 전화하거나 찾아오는 학부모들은 나부터도 싫은데... 찝찝하면서도 한편은 고맙다.
애가 저리 좋아하니.
이후로도 비슷한 풍경이 종종 연출된다
부담 될까봐 상의도 하기 전에 애가 미리서 포기를 해버리는 썩 애답지 못한 상황...
그러지 말라니까. 뒷바라지 해줄 수 있어. 어떻게든 해줄께. 아,있잖냐. 조리장수 체곗도온~!!!
마구 사정을 해서 안심을 시켜야 했다
사실 피아노를 전공시키려해서 하게 된 게 아니지.
악기를 전공시킬 생각이었으면 색 다른 악기를 찾았겠지
그저 음에 익숙해져서 조금 더 풍부하게 살아라고 집에서 내가 손가락 잡고 음계를 가르치고
제법 빠릿거려서 학원에 보내봤지.
너무 어리니 더 키워서 데려오라고 학원선생님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대는 걸
일주일만 맡아보고 그때 다시 얘기하자며 애를 남겨두고 나왔지.
일주일 후에 찾아가니 학원 선생님이 감격하더구만.
이런 애 처음 봤다고. 놓쳤으면 정말 아까울 뻔 했다고.
(내가 어려서 피아노 배울 때 귀 아프게 듣던 소린데?? ㅎㅎㅎ)
그리고는 글쎄 그날 이후로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쳐대는 거다.
전공을 하게된 이유는 그 뿐이다. 멈추지를 않아서...
언제라도 하기 싫어요 하면 즉시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는데
20년이 다되도록 하기 싫다는 말을 안하는 게다. 질긴 가시나!!
(나는 안 닮았군!)
초등 때도 콩쿨에 입상하고 폴란드 국립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게 되었는데
뭔넘의 애가 들어갈 경비 걱정을 다 하고 자빠졌다.. 헛 참.
다행인 건, 한국보다 일본이 음악 교육에 훨씬 덜 든다는 사실.
제대로 된 음악대학 교수님께 렛슨을 받아도 한국의 교수님께 받는 렛슨비보다는 덜든다.
환율대비 환산을 해도 그렇다. 게다가 아이와 선생님이 한사람처럼 친밀해진다.
렛슨만 받는 기계를 넘어서는 교감을 갖는다는 얘기다.
폴란드 국립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티켓을 30장 쯤만 소비해주면 되었다.
기타 일체의 제반 경비는 없다.
30장이면 가까운 몇가족만 나눠도 부족할 지경이니
우리처럼 주머니에서 바람소리가 쓍쓍 지나는 집이라도 해볼만 하다.
오사카 시립 오케스트라와도 그렇게 협연을 했는데
귀국한 다음엔 불가능했다. 콘서트가 문제가 아니라 기타 등등... 어휴!!
귀국 직전엔 가계부가 그야말로 태풍을 맞기도 했다
정말로 렛슨비를 감당해줄 수 없는 형편.
마음의 준비도 갖추지 못한 일이어서 한동안 휘청거리다가
아들과 나는 시골로 내려갔다.
길이 없다,
크는 애들을 형편이 풀릴 동안 잠시 기절시켜놨다가 3년 뒤에 눈 떠라 할 수 없고..
둘씩 해결하고 살자.. ㅎㅎ
어느날 딸애가 전화 너머에서 또 그런다
우리반 어떤 애 세종문화회관에서 협연했는데 버스 대절해서 사람들 실어나르고
끝나고는 호텔 부페로 모셔서 잔뜩 먹게했다고.
덕분에 저도 잘먹었다고. 볼 탱탱한 소리를 잘도 종달거린다.
"그랬어? 너도 여기로 친구들 몽땅 데려와라.
여기서 콘서트 하고나면 엄마가 우리 옆집 짜장면 집에서 곱배기로 먹게 해준다.
까짖 거. 군만두도 덤으로 먹여준다. 또 뭐 먹게 해줄까?"
여전히 행복한 목소리를 허물어뜨리지 않고 까르륵거리며 전화를 끊던 딸.
대학 입학 후 정말로 고향에서 콘서트를 했다.
한일 친선 콘서트... 일본 친구들과 함께 와서.
짜장면 곱배기와 군만두는 말고
무대 연습 중간 중간, 때 거르지 않게 하느라 식어빠진 김밥도시락만 열나게 사날렸나 보다.
찐만두도 몇 개 얹혀 있었던가??
그런 이유로
부득부득 일본 대학교를 가겠다는 애를 말리지 않았다.
그래. 그래라. 그쪽 풍토가 네겐 더 맞더라.
허락 떨어지니 혼자 찾아내서 혼자 원서 내고 유학 시험을 치뤘다.
성적이 괜찮아서 어느 대학을 가던지 무조건 장학금 준다 한다고.. 그때도 그랬다.
지금은 피아노도 없는 홀로 자취방.
가까운 교회에 가서 연습을 하고, 꼬맹이들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가끔 오늘처럼 전화 너머에서 지저귄다.
-"호호.. 엄마. 또 3등이어요"
-"1등 아닌 나머지는 꼴찌와 같다 했지? 외할아버지 말씀이다. 새겨 들어라"
수십 번 되풀이 한 그 소리를 물리지도 않고 또 하면서
팥쥐어매처럼 인심 고약한 엄마는 그렇게 인색을 부리지만
그때마다 호호호 딸은 물리지도 않고 웃는다.
자, 이제
조리장수에게 체계를 들어야겠다.(??)
울 아버지가 나직하게 웃으시는 소리 들린다.
마음이 참 따뜻타.
고맙다. 내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