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 풍경 하나
맨처음 일본 들어와서
무지무지 고생(?)하며 살 때
그러니까
큰 애는 한국에서 막 초등학교를 입학해서 시댁에 있었고
작은애가 다섯 살. 친정살이.
직장 휴직하고 유학이란 걸 왔는데
한 사람 장학금으로 둘이 먹고 살고 둘이 학교 다니느라
뱁새도 못되던 형편.
혼자 살기에도 빠듯한 장학금 받아서 둘 학비, 세 식구 부식비... 봉투 봉투 나누면
일주일 부식비가 삼천 엔 정도.
10kg 쌀 한봉지가 질 좋은 건 5~6천 엔을 웃돌았으니 2주일 분을 꼬불쳐야 쌀 한 봉지 산다는...
얼추 그런 계산.
집에서 미역국 끓여 한국 유학생들 저녁 식사라도 하루 하는 날엔
일주일분 식비가 단 번에 날아가는... ㅎㅎㅎ
급작스레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작은 애를 데려왔는데
장난감, 동화책은 언감생심. 100엔짜리 짜잔한 사탕 봉지 하나도 들려줄 수 없는 형편.
이발도 뚜덕뚜덕. 내가 가위질 해 시켜주는 바람에
들쑥날쑥 쥐 뜯어먹은 개떡쪼가리 꼴.
그래도 일요일이면
한국 있을 때부터 왕래가 있었던 교회를 나가는데
나고야 시내까지 가야했었고
두 구획마다 버스비가 올라가는 요금 시스템이라서
몇 십엔이라도 버스비를 아끼려면 가능한 멀리 가서 타야하므로
다리가 뻗뻗해서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을 때까지 자전거를 달려야 했던 때.
그 때
우리 말고도 한국인 한 명과
미국에서 파견온 선교사 가족이 그 교회에 출석하는 외국인이었는데
그집 애들도, 우리집 애도 일본어는 한마디도 안되던 형편.
어느날
예배 중에 문을 삐죽 열고 미국인 선교사 애들이 지네 엄마더러
"엄마!"
부르는 게 아닌가?
"!!!...???"
전북에서 유학온 남자분 깔깔거리며
"그래. 잘한다. 암 그래야지. 그래. 엄마라고 불러라. 맞다 맞아. 아이구, 잘 가르쳤다."
예배 중에 손뼉을 치고
일본 교우들도 빙긋이.. 킥킥킥.
우리 애녀석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기억해서 지들도 즈이 엄마를 엄마라고 부른 것.
세나라 애들.
한마디 말 안되어도 어쩌면 그리 잘 어울려 노는지.
우리 애가 우리 말로 "우리, 저기 가자" 하면 미국애, 일본애 할 것 없이
영낙없이 우루루 몰려가고
일본애가 "이제 저거 하자" 하면 즉시 그쪽으로 너나없이 달려가고
선교사 애들이 영어로 쏼라거려도
애들은 척척 알아듣고, 일제히, 같이, 망설임 없이 필요한 행동들을 했다.
애들 전혀 스트레스 안받고 각자 나라 말로 떠들고
마찬가지로 전혀 고민 따위 안하고 데꺽데꺽 행동들로 옮겨지니
대체 뭐가 문제겠는가?
어찌나 신기한 지..
옳아.
만국 공용어란
문법 철자 따져가며 십 몇 년 씩 배워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버벅거리는 교과 과정이 아니라
아이들 마음. 단지 그거로구나.
무릎을 치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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