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벌리면 가관이로군.
틀니를 혀?? ㅎㅎㅎㅎㅎ
애 가졌을 때 꼭 어금니가 한 둘 씩 어작나더니만..
둘째..
낳기 무섭게 도로 본향으로 달아난,
마취에서 꺠어나니 이미 가고 없던,
눈 한 번 맞추지 못한 애.
그때가 기중 심했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
학기 초라
뭔넘의 환경정리는 그리도 볶아댔는지
장학지도라는 명분으로 장학사님들 납시면
교장실 게시물의 글씨체가 맘에 안든다는 둥,
복도 게시물 색채 조화가 안맞다는 둥,
잣대도 없고, 기준도 없이 그저 장학사 본인의 취향으로만
깝깝하고 얼척없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곤 하던 때.
여선생님들의 복장은 단발머리에 흰 블라우스 까만 주름치마를 입어야지 않겠느냐는
본인의 30년대식 복고 취향을 장학지도랍시고 늘어놓던
그 얼척없던 시절.
똥똥해진 배를 이기지도 못할 지경인데도
다들 돌아가고 없는 학교에 혼자 남아
12시를 예사로 넘기면서 고넘의 환경정리를 했지.
완전 간판사. 또는 필경사.
예산 아낀답시고 반듯한 재료도 사주지 않는데
그저 내 일이니 죽어도 해야하는줄만 알고
필요한 건 내 주머니 털어 사서라도 죽을 둥 살 둥 매달리던 일.
3월 한달을 꼬박
기름값 아낀다고 난로 하나 주지 않은 미술실에서
그 추운 꽃샘 추위 덜덜덜 떨어가면서
쪼그리고 앉았다 일어났다. 풀칠해서 게시물 붙이고, 엎드려 글씨 쓰고..
아홉달 된 뱃속 애는 여전히 까탈을 부려서 물 한 잔도 제대로 못 넘길 지경인데..
쓰러지지 않고 제 발로 걷는 것만도 용할 판에...
수업은 또 얼마나 많았고.
지금 평균 수업시수의 정확히 두 배.
근무 시간 중엔
담임 맡은 반 애들 관리며 수업이며
고개 한 번 반듯하게 들 겨를이 없는 격무.
행여 애 가졌다고 적당적당 꾀부린다는 말이라도 들을까봐
그래서 여선생은 문제라는 말이라도 행여 듣게 될까봐
(모성 보호?? 그때 사정으로야 웃기던 표어에 불과했으니.. 가만..지금은 안그러나??)
안간힘을 쓰던,
그 바보같기만 했던 때. 어떻게 그걸 견디고 살았나 몰라.
교장실 난로는 출근 전부터 펄펄 끓지만
40명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교무실엔 초 미니 석유 난로 달랑 하나.
애들은 종일을 몸뚱이로 견뎌야하는데.
틀이 썩어 내려앉은 창문 틈에선 왕바람 쒸웅!!!
쉬는 시간에 꽁꽁 얼어붙은 발가락이라도 녹여보려고 그 옹색한 난로 옆에 모여들어서
빙 둘러 발가락을 녹이면
교감선생님 왈 :
꼴보기 싫게 난로 옆에 모여있다고 야단을 하던..
그러니까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같은 옛이야기.
시골 학교 실상은 그랬는데...
내 자식 문제 하나 더 풀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얻고
배 따뜻하게 잘먹고 잘 사는 게 문제가 아닌
당장 퍼렇게 질려있는 현실의 애들.
겨울에도 홋겹옷 입고 달달 떠는 애들 많았던...
그게 그 때 시골학교 상황
교도소 짓는 예산보다 교실 짓는 예산이 덜 들던 시절이니까뭐.
배 부른 부모들이 신분을 대물림하기 위해
학원으로, 가정교사로, 뇌물로, 아우성을 한다는 얘기들은 그저 먼나라 얘기인 것만 같던..
납부금 못내서 쫒겨가는 애들 납부금을
당사자도 모르게 대신 내 주고
홋겹 잠바로 가을부터 이듬 해 봄을 나는 애들은 겨울 외투라도 사입혀야하고
손등 갈라진 애들은 장갑이라도 슬쩍 밀어줘야하고
학급 애들 책이라도 읽히려면
내 주머니 털어서 서점 들락거리며 책 사다 학급문고라도 운영해야하던..
나 만이 아니고, 내 옆반 담임도, 그 옆반 담임도 다들 그랬지만
서로 내가 그랬다 말을 안하니
속으로만 그랬구나... 말없이 넘기던 일들
어떤 남선생님은 자취하던 애들 김치까지 담아다 주더라니..
김치통 들고 가다 내 눈에 걸렸던..
그런 속 터질 학교 실정은 뒷전이고
보충수업이니 야간 자율학습이니로 열 내는 부모들이
차암 철딱서니 없어보이던 때.
모여 앉으면 그저 요새 애들 학교 보내기 보통 일이 아니라면서
맨날 자기 아는 누구는 애 담임에게 봉투를 얼마 갖다줬다는 둥.
안그러면 학교에서 애 병신된다는 둥
누구는 또 어쨌다는 둥
속 터질 소리만 나불거리던 엄마들.
자기는 절대 그런 적 없고 자기가 아는 어떤 사람이 그랬다더라는...
말 없이 듣고 앉았으려면 속에서 뿔따구가 여나무개씩 솟구쳐 나오려하던..
그 대책없는 말들.
지금이라해서 얼마나 달라졌을까 모르지만..
뇌물이 잘못이란 걸 알면 스스로 절대 안하면 그만일 걸.
꼭 가족 이기주의에 잔뜩 헛배만 부른 사람들이 그딴 소리를 하더라구..
그렇게 봉투 받아먹었으면 안팎이 선생님이었던 우리는
진즉 배가 터졌어야할 걸.
봉투 안줘서 병신된 넘 있거든 나와보라 해.(투덜쭝얼!!)...(으흐! 새삼 승질 나!!)
하긴 강남 싸모님에 편입한 내 친구도 그런 소리 곧잘 하더라뭐.
어쩔 수 없긴 뭐가 어쩔 수 없어?? 얼마든지 어쩔 수 있지.
내 자식이 불법, 편법으로라도 배 부르게 잘살아야한다는 이기심만 버리면,
남들이야 어쩌든지 잘못된 거 아는 부모가 그 짓 안하면 돼지.
그저 가만히만 있으면 될 걸. 스스로 치맛바람 펄펄 날리면서 어쩔 수 없다그래 꼭.
그저 불쌍하고 짠한 건 농부의 자식들이지.
어쨌건 고넘의 학기 초 일에 밀려서
젖 먹던 힘까지 쏟는다는 게 그만
나보다 뱃 속 애가 더 보대끼다가
달도 차지 않고 훌쩍 날아가버렸는데
온몸뚱이 땡땡 부어서 날마다 울고 있는 내게
위문이랍시고 찾아온 교장아저씨 왈 :
"애가 죽고 없으니 분만 휴가는 내줄 수 없다" 하더라니까..원.
옆에서 그 말을 듣고만 있던 남편이 어찌 그리 바보같던지..
한 방 날려버리지 않고...
같이 왔던 서무실 직원의 입을 통해 그걸 알게 된 동료 여선생님들이
우루루 교장실로 몰려가 항의하는 사태.
꾀 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무리하게 일 부리더니
그 때문에 애 잃은 거나 같은데
수술해서 아직 걷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애가 죽고 없으니 분만휴가도 못내준다'는.. 그런 말이 나오더냐는...
나중에 들으니 그랬다더구만.
분만휴가는 못내주지만 병가를 내주겠다는 말이었노라는 옹색한 변명으로 쩔쩔 매시더라는...
몹시 씁쓸하고 몹시 쓸쓸한 기억.
눈물 나는...
그 애 가졌을 때도
지금처럼 이빨 때문에 가관이었는데..
아니, 지금보다 훨 심했지왜
원숭이처럼 입언저리가 온통 부어올라서
땔싹 큰 마스크로 덮지않으면 사람 같지도 않던..
지금 내 꼬라지를 보니 갑자기 그때
그 가관이던 때 생각이 다 나네 글쎄.
거스르면 20년 쯤 전인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