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기름(수선 중)

너는 좋겠다 첫사랑 선생 만나서..(제자-2)

튀어라 콩깍지 2005. 10. 30. 14:05

열 두학급씩 되는 도시 학교를 졸업하면

동창 얼굴도 서로 다 못익히고 흩어져서 얼굴 기억도 안나는 사람이 많으니

애틋하기도 그저 친한 몇사람에게만이고 말 한 번 나눠보지 않은 사람은 잊고마는 듯 싶다.

그런 데면데면함조차 불편하거나 애서롭지 않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내가 근무한 첫 학교는

뭍을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아이들이 2/3를 넘었었다고 기억한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여덟학급이었는데

1학년 애가 3학년더러 해라를 뻥뻥하기도 하고.

"이 녀석아, 선배에게 말투가 그게..." 나무라면

"조칸디요" 눈을 흡떠서 말문을 막던..

한 다리 건너면 죄다 사돈네 친척이 되는 아이들.

 

눈이 땡그랗고 몸집이 작은 아이가 있었다

내가 담임 맡은 아이들보다 한 학년 아래

그애랑 어찌어찌 연락이 닿았던 건 이 삼일 전 얘기했는데

동창 모임 카페에 들어가니

나와 통화한 다음에 기뻐하는 녀석의 글이 올라있다

 

 

 

아래, 그 글의 리플.

 

               . 다 내 덕인줄 알어라. 알긋나 친구~~~오늘도 힘내고 열심히 일해 

               . 너는 조컷다. 첫사랑 선생이랑 통화해서..

                 --들켜부럿네 

                 --ㅎㅎㅎ 어이어이, 위에.. **아저씨!! (내 리플)

 

그보다 압권은 가입 인사에 달린 댓글. 아래!

 

      선생님 참 밥갑습니다. ....여기까지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일본에 계신가봐요? ...

      구장리 보리베기 근로 동원 갔을 때 밭주인 아줌마는 북감제(감자) 쪄오고

      미술선생님께서는 반공탑 (70.80년대 각마을 입구에 있던 네모난 돌탑...때려잡자 김**

     ...그런 거 써있던)에 페인트 묻히고 글씨 쓰시던 거 생각납니다 

 

!!!!!!

때려...잡...자???

우하하하.. 허리를 꺾는다.

그리고

퍼뜩. 생각난다

그래 그때. 보리베기.

이후로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았던 무의식의 기억이 선명하게..

 

 

 

 

이장님이 미술선생님 오면 부탁한다고 아주 벼르고 계시던 글씨.

동네 어귀 돌기둥 반공 표어.

아마 말들이 죄다 그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내용은 정확치 않지만 쓰면서도 민망하던 말들.

야산 언덕에 흔히 시멘트 블록으로 대문짝만큼씩 박아놓던,

과격한 단어들... ㅎㅎㅎ

사다리 딛고 올라가서 하루 종일 땡볕 받으며 썼지 아마.

글자 수 많고 네 면이나 되는데다 닳고 빠진 붓으로 익숙치 않은 페인트 작업을 하기가 수월치 않았으니..

 

아이구,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고 댓글을 달았는 지...

한참 웃는다

 

오후까지 사다리에 붙어있으니 지나는 동네 어르신들마다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하시던...

정말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섬.

이름도 아름다운 청산도.

아이들도 꼭 그렇게 푸르고 단단하고 순진한 바다빛이었는데..

반짝반짝 깻돌들...

 

그 깻돌들이 지금 나를 행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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